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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 - "위대한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1년"

by 로즈마리쏭 2025. 3. 7.

영화 &lt;항거:유관순 이야기&gt; - &quot;위대한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1년&quot;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 줄거리

1919년 3월 1일, 유관순(고아성)은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한 후, 고향인 충청남도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대규모 만세운동을 주도한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인해 그녀의 부모가 눈앞에서 목숨을 잃고, 유관순 역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그녀가 갇힌 곳은 8호 감방. 이곳에는 이미 권애라(김새벽), 김향화(김예은), 이옥이(정하담) 등 다양한 신념을 가진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어 있다. 신분도, 나이도 다르지만, 이들은 하나의 목표를 위해 함께한다. 감옥 안에서도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본의 억압에 저항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더욱 혹독한 고문과 처벌이 이어진다.

유관순은 극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동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으며, 다시 한번 감옥 안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한다. 결국 1920년 3월 1일, 수감자들은 교도소 안에서 독립을 외치는 만세운동을 벌인다. 일본 경찰은 이를 강하게 진압하고, 유관순에게 극심한 고문을 가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결국, 유관순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1920년 9월 28일, 차가운 감방에서 스무 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그녀의 희생과 신념은 감방 안의 동지들, 그리고 이후 독립운동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영화는 유관순이 마지막까지 독립을 외치며 사라지는 모습을 통해, 그녀의 정신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강조하며 끝을 맺는다.

영화의 역사적 의미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는 단순히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것을 넘어, 일제강점기 당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역할과 희생을 알리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유관순 열사는 3.1운동을 주도한 후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으며, 극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기존의 독립운동 서사는 주로 남성 독립운동가 중심으로 다루어졌기에, 여성들의 저항과 희생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었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잊혀졌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데 큰 의의를 갖는다.

특히 영화는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에 수감된 여성들의 모습을 통해, 다양한 계층과 배경의 독립운동가들이 함께 싸웠음을 보여준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권애라, 김향화, 이옥이 등은 실제 역사 속 인물들로, 이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했지만 오랜 기간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이 영화는 단순한 개인 영웅담이 아니라, 함께 항거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크다.

또한, 영화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개봉되면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독립과 민주주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다시금 되새기게 했다. 과거의 독립운동가들은 단순히 일제의 지배에 저항한 것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 인권을 위해 싸운 것이며,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로 남아 있다. 유관순 열사의 희생과 신념을 스크린을 통해 다시 조명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독립이 어떤 희생 위에 세워졌는지를 깨닫게 한다.

또한, 영화의 담담한 연출과 사실적인 고증은 감동을 극대화시키면서도 감성적인 과장 없이 역사적 사실 자체에 집중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러한 연출은 관객들에게 더욱 깊은 울림을 주었으며, 특히 청소년들에게 역사 교육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영화를 본 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방문하거나,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도 중요한 역사적 의미 중 하나다.

결과적으로, 항거: 유관순 이야기는 단순한 감동적 영화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다양한 얼굴을 알리고, 오늘날에도 이어져야 할 자유와 민주주의 정신을 강조하는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유관순 열사의 실제 역사적 행적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면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한 그녀는 1916년, 서울 이화학당에 입학하며 본격적으로 신학문을 접하게 된다. 이화학당에서 교육을 받으며 민족의식이 점차 강해진 유관순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16세였던 그녀는 일본의 강압적인 식민 통치에 반대하며 독립을 외쳤고, 이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학교가 강제 휴교령을 내리자 고향 천안으로 내려간다.

고향으로 돌아온 유관순은 독립운동을 이어가기 위해 천안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대규모 만세운동을 계획한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주민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에 격분한 일본군이 무력을 사용해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유관순의 부모(유중권, 이소제)가 일본 경찰의 총칼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유관순 본인도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다.

체포된 후, 그녀는 공주 경찰서와 공주 감옥을 거쳐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감옥에서도 그녀는 굴하지 않고 독립을 위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 경찰은 그녀를 가혹하게 고문했으나, 유관순은 끝까지 독립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아 서대문형무소 내에서 옥중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더욱 심한 고문을 받았으며, 극심한 부상으로 인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1920년 9월 28일, 유관순은 18세의 나이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사망 당시 그녀의 시신은 온몸이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으며, 일본 당국은 그녀의 죽음을 은폐하려 했다. 유족들은 어렵게 그녀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렀고, 이후 그녀의 희생은 대한민국 독립운동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이야기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그녀의 희생이 역사적으로 인정받으며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유관순 열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후 그녀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여러 기념사업이 진행되었으며, 천안에는 유관순 열사 기념관과 추모비가 세워졌다. 그녀는 단순한 독립운동가를 넘어,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남아 있으며,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희생정신을 기리며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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